누가복음 20장 45절~21장 4절
"넣는 것을 보시고"
최혜정 집사님의 대표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새 날 새 아침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저희를 이 자리에 나오게 하신 은총 깊이 감사드립니다. 보잘것없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매 주일 말씀으로 선한 길 갈 수 있게 인도해 주시지만 한 주를 돌아볼 때 우리의 결심은 한순간에 그치고 세상적 욕심으로 가득 차 가진 것에 겸손치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나약함을, 가벼운 다짐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던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고 우리의 예배 형식을 바꿔놓음에 적잖이 당황하며 두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마스크를 쓰게 되어서 우리는 헛된 말을 줄이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 또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위기와 시련이 와도 항상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는 주님, 저희가 안전하게 이 상황을 잘 극복하여 나에게 주어진 것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며 주변 사람들을 귀하게 섬기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로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 특별히 환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5월은 푸르름으로 가득하여지고 가정의 달로 서로 정을 나누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병마로 인해 가족을 만날 수도 없고 오직 주님의 은총만을 간구하는 환우들의 무너지는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고 속히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가정의 불화로 고통받는 성도들도 그 해답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많이 부족하고 어리석지만 말씀으로 무장하여 산 순교자의 삶을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시고 항상 우리의 겟세마네에서 깨어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부어주시옵소서. 모든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게 하시고 장소가 어디든 상황이 어떻든지 주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전하여주시는 정한조 목사님의 영육을 강건하게 붙잡아 주시고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잠히 충성하며 봉사하는 손길도 기억하시어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를 소망하여 이 모든 말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코로나로 적잖이 당황스럽지만 매일 아침 마스크를 쓰며 더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주신 기회를 제대로 삼아 봐야 할 것들을 더 돌아보고 지나쳤던 것들에 귀 기울어야겠다.
♪ 찬송가 25장 면류관 벗어서
1.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저 천사 기쁜 노래가 온 땅에 퍼지네
내 혼아 깨어서 주 찬송하여라 온 백성 죄를 속하신 만왕의 왕일세
2.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나네
하늘의 천사도 그 영광 보고서 고난의 신비 알고자 늘 흠모하도다
3.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온 세상 전쟁 그치고 참 평화 오겠네
주 보좌 앞에서 온 백성 엎드려 그 한량없는 영광을 늘 찬송합니다.
아멘.
...첫 소절 바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면류관이 내 자존심이고 내 주장이네'...
♪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1.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2.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주 이름 전파하면서
무한한 복락 주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3.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
불의한 일을 버리고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4. 주께서 심판하실 때 잘했다 칭찬하리니
이러한 상급 받도록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도스토예프스키 수용소 경험 바탕으로 쓴 글.
부활 주인 주간에 노동을 하지 않고 자유가 주어지자 수용소 않은 아수라장이 됨.
많은 사람이 술과 도박에 취하고, 온갖 싸움이 난무함.
그는 그런 상황에 사람들에 환멸을 느끼던 중 20년 전 9살이 넘어가던 8월 때 기억이 떠오름.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말을 또렷이 듣고는 정신없이 농노에게 달려갔.....
사람들은 그를 마레이라고 불렀고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그에게 갔다.
그러나 그는 '여기는 늑대는 없어'라고 대답함.
그러고는 가만히 어머니와 같이 나를 품어주었다.
...
'내가 뒤를 봐줄게'
금세 마레이를 잊어버림. 그런데 20년이 지난 즈음 그것도 시베리아에서 또렷하게 떠올리게 된 것.
그 만남은 계속 마음속에 자리 잡고 꼭 필요할 때마다 떠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 그 만남을 기억하고는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연약한 사람의 삶을 품어줘야 함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그와 달리 마땅히 그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기관들, 율법 해석에 권위가 있고 수당을 받지 않고 봉사로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대신에 사업을 하거나 후원을 받아 생활을 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이었고, 그들은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고, 지도자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였다.
당시 서기관들의 주된 일 3가지 : 율법 항목 규정, 제자들에게 가르침, 율법을 집행하는 일
구약에는 613가지의 율법이 있었으며 이것은 창세기의 3가지, 출애굽기의 ............. 등의 조합이다.
이 중 무엇무엇을 하라는 긍정 명령 248가지, 부정 명령이 365가지였다.
이 중 양을 도둑질하면 4배, 소를 도둑질하면 8배로 갚으라는 것도 있었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포괄적인 명령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일을 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럼 이 일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이 일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다.
누가복음 6장에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그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서 먹은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 곡식밭에서 낫을 대는 것은 금하셨지만 손으로 따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위할 배려였다. 문제는 그날이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시비를 걸어왔다. 그 당시로는 규정 4가지나 어긴 것이었다.
첫째는 따는 행위 추수, 둘째는 손으로 비빈 것 탈곡, 후 불었던 키질이 세 번째, 마지막으로 깐 밀을 먹었던 것은 요리를 한 것과 같았음.
잘못됨에 대한 지적의 시작.
46절....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함. 그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복장.
그 당시 서기관들은 머리 춤에서 허리나 다리 정도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손목과 이마에는 율법 구절을 담은 작은 가죽 상자를 메고 다녔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다는 의미.
옷은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신분을 드러내주기도 하고, 행동을 조심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특히 정복, 예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그 옷을 입혀준 국가, 절대자의 이름을
시장은 .... 아고라(광장)라는 단어가 나왔다. 가장 번화한 곳을 뜻함. 그 단어는 단수도 아니고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음.
서기관들은 도시의 이 시장, 저 시장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받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랍비는 크다, 많다에서 유래하여 나의 스승님이라는 의미이다. 굉장히 좋은 의미의 말이었으나 서기관들이 그런 존재가 되기보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기에 본래의 의미를 격하시켰다.
서기관들은 당연하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존재임에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존재가 되었다.
의식해야 하는 분과 의식해야 하는 것을 바르게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이 어떤 직책에 있기 되는지 그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르게 된다.
회당의 높은 자리, 잔치의 윗자리
회당의 높은 자리는 일명 모세의 자리라고 불리었고 서기관 중에서도 가장 학식이 높다는 사람이 앉았으며 때로는 부자가 권세가 있는 사람에게 부여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회중을 마주 보고 있어야 했다. 아마 편한 자세로 앉아있기도 어렵고 한편으로는 벌을 서는 자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그 자리를 즐겼다.
잔치는 안방과 거실을 겸한 당시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식탁이 있었다. 주인의 오른쪽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 그 다음은 왼쪽자리였다. 당연히 문에서 가장 가까운 식탁의 끝이 제일 낮은 자리였다. 시중 드는 사람들이 보통 그 자리에 앉았다. 서기관들은 주인의 좌우에 앉는 것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해준다고 생각했다.
47절.....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일도 행함.
혼자서 가계를 꾸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더 어렵다. (가수 이수영 집사님의 간증이 떠오른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언급할 때 대표적으로 고아, 과부, 객(나그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곡식을 추수할 때나 포도 수확때에도 일부를 남기도록 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몫이었다.
그런데 이런 과부가 무엇이라도 조금 갖고 있으면 서기관들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서슴없었다.
이것은 폐지로 모은 전재산을 보이스피싱으로 빼앗아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봉급이 없었으니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기도를 오래했다.
연극에서는 또렷하게 배우를 보이게 하려고 분장을 짙게, 예전에는 가면을 썼다. 그것이 외식이다.
천재 가면을 쓰면 그는 천재가 된다. 맡겨진 배역을 실감나게 하면 국민배우, 씬스틸러가 된다.
의사 가운을 입으면 또 의사가 된다.
배우는 대본에 실린대로 실남나게 말하고 연기를 하면 된다.
그러나 기도는 연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중심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다고 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와 큰 거리에서 연기하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런면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비밀교제와 같다.
서기관들이 대부분 바리새파이기에 서기관들에 대한 지적은 바리새인 지적과 동일하다.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7 부류로 나누었다. 딱 두 부류만 신실한 바리새인이고 나머지는 형식적인 바리새인이라고 여겼다.
첫번째 부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는 타고난 바리새인이었다. 이런 사람이야말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참 바리새인이라고 하여 존경했다. 이들이 최고의 바리새인이었다.
두번째는 하나님 경외형 바리새인이였다. 이들 역시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겼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송 대상이였다.
세번째는 계산기형 바리새인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해보고 어느정도 선을 행해야지만이 그 죄를 상쇄시킬 수 있는지 늘 계산을 맞추었던 사람들이었다.
네번째는 잠시대기형 바리새인이었는데,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될 핑계와 구실을 항상 찾는 사람들이었다.
다섯번째는 어깨으쓱형 바래새인이었는데,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든 시장이나 큰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으스대며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여섯번쨰는 등굽이형 바리새인으로 자신이 겸손한 사람인 것으로 보이기 위해 등을 굽게 만들어 땅을 보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일곱번째는 멍든 상처형, 또는 유혈형 바리새인들인데 이들은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가다가 벽이나 장애물에 부딪혀 이마에 멍이 들거나 피를 흘리며 다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마나 몸에 난 상처가 자신들의 경건을 드러내주는 흔적으로 여겼다.
당시에 신실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도 있었지만 다수는 외식이 일상화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유형이 나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는가?
: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바리새인, 잠시대기형 바리새인, 어깨으쓱형 신앙SNS 바리새인, 멍든 상처형 바리새인 유형에 속하는 것 같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본래의 바리새인과 같이 본래의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자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서기관들의 삶은 한 마디로 '자기 중심적 인생', '자기를 드러내는 인생'이었다.
문제되는 유형의 공통점은 '나', '자기'다.
오직 자신에게만 향하는 사람으로 자신만 드러내기 바빴다.
그 때 그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과부였다. 서기관에게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러하셨다.
여인의 뜰에는 모두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다. 이 과부는 동전 2개를 넣었다.
이것은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다. (얼마전 폐지수거 할아버지의 2천원이 또 생각난다...)
주님은 그 여인이 단지 동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임을 보시고 그 인생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으로 보셨다.
그래서 이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 것.
과감하게 바리새인의 모습을 버리자. 그리고 렙돈 2개를 드리며 하나님을 바라봄과 같이 주님께 그 시선을 옮기자.
이 땅에 다양한 갈등과 세속적 가치관을 좇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교회가 교회를 구성하는 나 자신이 주님을 향해야하는 시선을 상실하고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는 일에 동분서주 했기 때문이다.
무너진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우리 사회를 새롭게 해주실 분도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시선을 주님께 맞추는 사람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셨다.
우리도 주님께 시선을 맞추면 교회와 세상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그 통로가 되기 위하여 우리 모두 눈을 들어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아가자.
언제나 소망은 자기 욕심 부리는 사람이 아닌 주님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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